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아 칼라스 (문단 편집) === 이탈리아 활동과 결혼 === 1947년 베로나에 도착한 칼라스는 '라 조콘다' 공연의 지휘를 맡은,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 지휘계의 본좌였던 툴리오 세라핀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후 세라핀은 그녀의 멘토로서 그녀의 음악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47년 8월 2일 베로나 아레나 무대에 올려진 '라 조콘다' 공연에서 조콘다 역을 맡은 칼라스는 리허설 중 다친 다리에 깁스를 감고도 펼친 열연으로 성공적인 이탈리아 데뷔를 마친다. 하지만 이전에 서술되어 있었던 것처럼 '라 조콘다' 이후 그녀가 곧바로 탄탄대로를 걸은 것도 아니었고, 곧바로 세라핀의 총애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라 조콘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지만 세라핀이나 베로나 극장은 그녀에게 딱히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고 이후 추가 출연 계약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라 조콘다 공연 후 그녀는 일자리가 없었고 오디션은 보는 족족 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때 그녀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준 이가 나타났으니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라는 사업가였다. '라 조콘다' 공연에서 90kg의 거구의 젊은 소프라노에게 매료되어 가능성을 발견한 메네기니는 그녀의 후원자를 자처하게 된다. 메네기니는 칼라스보다 28세 연상[* 칼라스의 아버지와 동갑이었다.]이었고 키도 작았지만 젠틀했고 칼라스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디션용 옷과 신발이 든 가방이 전부였던 칼라스에게 메네기니는 엄청난 의지가 되었다. 메네기니의 도움으로 당장 숙식이 해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메네기니는 그녀의 오디션을 위해 유명 오페라 하우스의 전문가를 코치로 붙여줬고 또 그녀가 연습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도 붙여줬다. 메네기니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여 그녀가 공연에 설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했다. 비록 밀라노 스칼라좌에서는 거절당했지만 메네기니의 노력으로 칼라스는 1947년 12월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오디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지휘자는 또다시 툴리오 세라핀이었다. 칼라스는 그리스에서 [[바그너]]를 전혀 공부한 적이 없었지만 메네기니가 고용한 피아니스트와 함께 약 열흘간 급히 이졸데를 연습했고, 오디션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체를 능숙하게 불러 세라핀을 만족시켰다. 칼라스는 라 페니체 극장과 계약을 맺고 트리스탄에 이어 몇 주 후에 공연된 투란도트에도 출연하였다. 세라핀이 칼라스를 크게 중용한 것처럼 서술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칼라스가 이탈리아에서 데뷔한 라 조콘다 공연 이후 세라핀은 칼라스를 찾지 않았다. 다시 세라핀과 칼라스가 조우하게 된 것은 위에 나와 있는 것처럼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으로, 당시 바그너가 공연되는 일이 거의 없었던 이탈리아에서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줄 아는 가수조차 없었다. 오디션에서 칼라스가 1막 전체를 막힘없이 부르자 세라핀은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 후 세라핀은 바그너의 대작 발퀴레를 공연할 때까지 또다시 일년간 칼라스를 찾지 않았다. 이처럼 세라핀이 칼라스를 기용한 것은 초기에는 바그너 오페라 때문이었다. 칼라스는 트리스탄으로 라 페니체에 데뷔한 이후 투란도트, 아이다, 운명의 힘 등에 출연했지만 대부분 세라핀이 아닌 다른 지휘자였다. 세라핀이 칼라스의 추천장을 써주기도 했지만 메네기니가 공연 성사를 위해 발벗고 나섰던 덕분이었다. 물론 나중에 세라핀은 발퀴레 공연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에도 칼라스를 중용했다. 40년대말 칼라스는 메네기니의 노력으로 이탈리아의 각 지방 극장에 데뷔하며 점차 경력과 인지도를 쌓아갔다. 칼라스는 메네기니와 결혼하기를 원했으나 메네기니가 계속 청혼하지 않자 결국 그녀의 언니 재키가 이탈리아로 직접 건너와 메네기니와 담판을 지었고 1949년 4월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 이후 빠른 시간만에 칼라스는 너무나 유명해져서 세계적인 소프라노가 되었다. 1949년 1월에는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 팬들이 전설적이라 칭하는 진기한 공연을 했다. 원래 극장과 맺은 계약은 1월 8/12/14/16일 [[리하르트 바그너|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제2부 '발퀴레' 공연에서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배역인 브륀힐데 역을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비로 뒤이어 라 페니체에서 상연될 예정이었던 [[빈첸초 벨리니|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오페라)|청교도]]에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배역인 엘비라 역으로 캐스팅된 소프라노 마르게리타 카로지오가 인플루엔자로 앓아누워 하차하자, 두 공연에서 모두 지휘를 맡은 세라핀의 요청을 받아들여 1월 16일 '발퀴레' 공연을 마치고 19/22/23일 엘비라 역까지 노래했다. 완전히 다른 성격의 음악과 창법, 연기를 막힘없이 소화해내는 이 가수에게 청중들은 그야말로 [[뿅가죽네]] 상태가 되었다. 유명한 오페라 연출가 프랑코 제피렐리도 이 때의 공연을 보고 경악했는데, 훗날 '그것은 마치 [[비르기트 닐손]]이 바그너 공연을 마치고 사흘 만에 베벌리 실즈의 대역을 노래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 일이 더욱 대단한 것은, 칼라스가 엘비라 역을 단 1주일 만에, 그것도 '발퀴레'를 계속 공연해가며 짬짬이 익혀 공연했다는 점이다. 다만 악보는 다 외웠어도 가사는 다 외우지 못해서, 무대 앞에서 가사를 읽어주는 프롬프터가 'Son vergin vezzosa'(나는 매혹적인 처녀)라고 읽어준 것을 잘못 알아듣고 그만 'Son vergin viziosa'(나는 사악한 처녀)라고 노래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러나 브륀힐데 역을 노래하고 사흘 만에 엘비라 역을 노래하는 '기적'을 마주한 관객들은 그런 실수쯤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이 때의 경험은 이후 경력을 봐도 상당히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 발퀴레 공연은 칼라스의 경력에 전환점이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실 이 공연도 역시 원래 주연 가수가 있었지만 대역으로 출연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 발퀴레 공연 이후 세라핀은 본격적으로 칼라스를 기용하게 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칼라스 초기의 커리어에서 이탈리아 오페라 못지 않게 바그너 오페라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바그너 자체가 이탈리아에서 거의 공연되지도 않았는데 정서적으로 이탈리아인들에게 전혀 맞지 않았고, 바그너 오페라를 부르면 목이 망가진다는 괴담이 이탈리아에 널리 퍼져 있었다. 단순히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일이 아닌게 [[루치아노 파바로티]]조차도 바그너, 특히 트리스탄은 목소리가 망가지기 때문에 안부르겠다고 몇 차례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어쨌거나 당시 이탈리아에서 바그너 공연은 무척 드물어서 바그너의 발퀴레 등을 무척 좋아했던 [[마리오 델 모나코]]는 인터뷰에서 바그너를 자주 부르고 싶었지만 너무나 기회가 없었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바그너를 공연하려 해도 목소리가 망가진다는 핑계로 부르기를 꺼리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칼라스는 한동안 이탈리아에서 공연되는 바그너 공연들에서 기회를 잡았다. 바그너로 해당 극장에 데뷔하고 이후에 이탈리아 오페라 주연 제의가 오는 그런 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물론 유명해진 이후 칼라스의 주요 레퍼토리는 이탈리아 오페라, 특히 도니제티와 벨리니의 낭만주의 벨 칸토 위주로 확립되었다.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공연 출연을 위해 동분서주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녹음을 취입하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덕분에 칼라스는 데뷔 초 시절부터 의외로 많은 녹음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